슈뢰딩거의 직딩

[67] 직장 잡담 - 커뮤니케이션에도 개연성이 있어야 본문

k-직장인

[67] 직장 잡담 - 커뮤니케이션에도 개연성이 있어야

baark 2022. 3. 8. 23:41

흔한 판타지 RPG 퀘스트 흐름

첫 직장도 그랬고, 그다음 이직한 곳도 미팅 없이 잘 굴러가곤 했다.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원체 레거시가 있던 곳들이라 그냥 정해 진 패턴을 따라가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신생아 단계나 다름없는 현 직장 현 부서에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회의가 너무 이상했다. 회사가 망조라는 걸 보여 주는 지표 중 하나가 회의가 많다는 거라는 생각도 있었기에.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 없다. 능력이 안 되니 능력이 되는 사람들의 뇌를 아웃소싱하기 위해 미팅을 하는 건 알겠는데, 우동사리 뇌를 가진 우동인간이 과연 자신이 선택한 능력자의 머리에 든 게 뇌인지 자신과 같은 우동사리인지 구분할 분별력이 있을까? 그건 생각해 볼 일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어떤 메세지와 함께 액션 아이템을 만들어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에는 반드시 맥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최근 느낀다. 내러티브에 플롯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어떤 커뮤니케이션 지점으로 도달하게 만들려면 충분한 빌드업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빌드업은 하나 이상의 단계를 필요로 한다. 특히 자신보다 더 연차가 높은 이들 사이의 소통을 매개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하는 나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상사가 아무 맥락도 없이 일을 시켜도 킹받는데, 연차 적은 놈이 피1엠이랍시고 일을 주면 얼마나 킹받고 하기 싫겠는가.

그러니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윗놈들이 조직 전략과 비즈니스 케이스를 안 짜서 내 담당 플젝이 소잃고 뇌약간 고치는 꼴이 되고 있다고 하자. 올해 부서 전체의 사업 전략이 어떻게 될지, 그 안에서 내 담당 플젝은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지를 바로 물어볼 수 있겠지만, '부서 미션/전략 없이도 플젝을 잘 굴릴 노력을 했는가?'하는 놀라운 질문을 할 게 뻔한 상황이라면? 그러면 프로젝트가 크게 리스키하지 않은 초기 마일스톤을 지났을 때 핵심 실무자들 사전 논의를 열어서 읍소한다. '여러분 많이 힘드시죠. 제가 이거 위에다 얘기해 볼게요. 근데 얘기하려면 여러분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업무에 어려움을 겪었는지 정리해서 올려야 해요. 여러분들의 업무 환경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근거를 함께 마련해 봐요!' 하면서. 그렇게 본 실무자 회의에서 뭘 말할지 대충 전략을 짠다. 실무자 논의에는 실무자분들의 상사분도 참관시켜 현재 플젝 상태를 리뷰한다. 그리고 마치 이 회의 없었으면 몰랐을거라는 듯 '어... 이건 조직 전략이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조직 전략을 실무자가 감히 어떻게 만들겠어요 머쓱; 중간 리더십에 에스컬레이션할게요!'하게 되는 거다. 마침내 조직장에게 논의 의제가 올라간다. 조직 전략 좀 만들어 달라고.

ㅎ... 이렇게 정도의 최소 3단계를 밟는다. 이때 단계마다 주요 기능 매니저 (Functional Manager 정도로 보면 될 듯) 분들께 리마인드하고, 진행 상황에 대한 의견을 계속 구한다. 오랜 장급 이력으로 집중력 부족이 되어 버린 몇몇 분들의 기억도 계속 리프레시해 주면서, 후덜덜한 경력으로 모든 것을 꿰고 있는 빈틈 없는 베테랑 분들에게도 '얘가 역량은 좀 낮지만 노력은 하는구나'의 인상을 줘서 참여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이 방법은 체계 없는 곳에서 지 최애캐 말만 듣는 나르 포스트모던 젊꼰 교수 같은 상사가 윗자리를 차지한 타이타닉 같은 조직에서 내가 선택한 커뮤니케이션 옵션이다. 안타깝지만 이 포스팅의 엔딩은 새드다. 저렇게 했더니 최애캐한테 컷당했으니까. 부서 미션 방향성 생각 말고 그냥 플젝 미션이랑 KPI 정해서 위로 올리면 그때 생각하겠다고. 세상 살기 정말 편하다 그쵸?

Comments